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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한국 고미술

화성능행도 華城陵幸圖-color on silk -53.9☓146.2cm (eight-panel screen)

by 주해 2022. 11. 21.

2019-12-11 22:03:58

 

 

LITERATURE

宇鶴文化硏究 제17호-민화, 궁중의 담을 넘다(용인대학교박물관, 2016), pp.66-83, 134-149, pl.7.정조, 8일간의 수원행차(수원화성박물관, 2015), pp.52-57, pl.7.宇鶴文化硏究 제14호-화성능행도병(용인대학교박물관, 2011)

 

작품설명

화성능행도는 1795년정조 19 윤2월 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홍씨1735-1815를 모시고 부친 사도세자1735-1762의 묘소인 현륭원에 행차하며 벌어진여덟 가지 장면을 그린 병풍이다. 조선시대에는 궁중에서 치룬 행사를 그림으로 기록해 기념하고 후대에 남기는 관례가 있었는데, 이렇게 그려진 궁중기록화 가운데화성능행도는 그 행사의 규모나 역사적 의미, 회화성 등에 있어 단연 특출나다고 할수 있다.을묘년1795은 정조에게 여러 가지로 뜻깊은 해였다. 정조가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국왕이 된지 20년이 되는 해이고, 자신을 낳아준 사도세자와 혜경궁이 함께 회갑을맞는 해이기도 했다. 1789년 천하의 명당지라는 화산花山 아래에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을 조성한 이후 매년 수원으로 행차해왔지만, 을묘년의 행차에서는 그 동안 2박 3일 정도였던 일정이 7박 8일로 늘어났고, 처음으로 헤경궁을 모시고 화성행궁에서 회갑잔치를 여는가 하면 노인들을 위한 연회를 벌이고 군사훈련을 거행했다.

사도세자의 복권과 혜경궁에 대한 우대, 나아가 왕실의 기쁨을 백성들과 함께 하고자 했던 목적이었고 이러한 역사와 그 역사의 장엄함이 고스란히 화성능행도에 담겨 있는 것이다.현재 국내외 8폭 병풍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것은 단 4좌뿐으로, 삼성미술관 리움,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이 각 1좌씩 소장하고 있고 그 외 1점이 이번 출품작이다. 낱폭으로는 동국대학교 박물관과 리움에 각 1점씩 국내에 2점, 교토대학종합박물관 5점, 도쿄예술대학 1점 등 일본에 6점이 전해진다.화성성묘전배도윤2월 11일정조가 공자를 모신 향교 대성전에서참배하는 모습정조 일행은 윤2월 9일에 창덕궁을 출발해 시흥행궁에서 하루 머문후 이튿날 사근평肆覲坪행궁에서 점심을 먹고 화성 행궁에 도착했다.이 날은 비가 내려 이동에 어려움이 있었다. 본래 7박 8일의 행차기간동안 화성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사도세자가 잠든 현륭원을 참배하고행궁에서 혜경궁 진찬과 양로연, 성묘 참배의 순으로 행사를 진행하려 했으나, 혜경궁이 이틀에 걸친 장거리 여행으로 피곤할 것을 고려해 현륭원 방문을 하루 미루고 행사의 첫째 날인 11일에 향교의 성묘를 참배하는 일정으로 시작한다.‘성묘聖廟’란 공자의 신위를 모신 향교의 대성전을 말하는 것으로 화성 향교에는 정위正位에 공자, 배위配位에 안자, 증자, 자사, 맹자를 비롯해 10철과 6현, 우리나라의 선현 15인의 신위神位가 있었다. 정조는 이곳으로 이동할 때는 융복을, 참배할 때는 면복을 입었으며 신하들은조복으로 갈아입었다 전한다. 작품은 상단부터 정조의 판위가 설치된대성전과 그 앞에 조복을 입은 좌우통례가 정조의 판위 앞에 부복한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승지와 사관 등은 모두 조복 차림으로 표현했다.

뜰에는 청금복을 입은 유생들을 열좌하고 대성전 문 밖으로는 정조를 수가한 배종백관을 융복 차림으로 동서 나뉘어 앉혔으며 뒤로는 명륜당이 자리한 모습을 보여준다. 명륜당은 정조가 대성전에 나아가기 전 잠시 들러 면류관과 조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대차大次로 사용한 곳으로, 전하는 바에 의하면 대차에서 조복을 갈아입은 정조가 동쪽 협문으로 들어가 동쪽 계단을 통해 미리 설치된 판위에 배례拜禮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작품은 이 장면을 도상화 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배례 후 성묘 안으로 들어가 봉심하는 순서로 그려진 『정리의궤』의 <알성도〉와 다른 모습이다. 기관에 소장된 여타 3점의 능행도병또한 본 작품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어 애초에 능행도병풍과 의궤는묘사의 차이를 두고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참고도판각 소장본의 <화성성묘전배도> 부분낙남헌방방도윤2월 11일정조가 낙남헌에서 과거 급제자에게합격증을 주는 의례 모습첫 날의 일정을 향교의 성묘聖廟, 대성전를 참배하는 것으로 시작한 정조는 낙남헌洛南軒에서 문무과 시험을 참관한다. 향교를 찾아 공자에게 인사한 후 학문을 장려하는 과거를 보는 것이 적절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무과 시험은 이미 1차 시험을 치렀기에 이 날은 2차 시험을 시행했다. 문과 시험은 우화관于華館에서 거행됐고 정조가 성묘에 참배할 때 참석한 유생들도 함께 응시했다.작품은 과거를 시행한 후 방방례放榜禮, 왕이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합격증을주는 절차가 거행되는 장면이다. 상단에 어탑이 있고 뜰에는 급제자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어사화를 쓰고 있어 당일 합격자들임을 보여준다. 우측에는 악공들이 배치되어 있으며 행사장 바깥쪽으로는 호위군관들이 둘러싼 모습이다. 이날은 과거 합격자를 내는 경일慶日인만큼 작문 밖으로 관광민인들이 모여든 모습인데 면면을 그려낸 풍속적인 표현이 눈에 띈다.

갓 쓴 이들과 유건을 쓴 유생 뿐 아니라 한삼汗衫을 낀 기녀, 악공, 손에 부채를 든 재인 등을 다채롭고 세밀하게 그려냈으며, 상단의 수직 배열과 대비되는 어수선한 배치를 취함으로써방방의가 끝난 후 유가를 시작하기 전 들떠있는 민심을 드러내고 있다.행사는 방방이 끝난 후 회방 대신과 사관 선방관이 정조에게 전문을올리고 공복을 입은 전전관과 독전관이 전문을 펼쳐 읽은 후 마무리되었다.참고도판각 소장본의 <낙남헌방방도> 부분서장대야조도윤2월 11일정조가 서장대에서 야간 군사훈련에 참관한 모습윤2월 12일 오전, 정조는 혜경궁을 모시고 현륭원을 참배했다. 1762년 사도세자가 사망한 이후 남편의 묘소를 처음 방문한 혜경궁의 슬픔은 극도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혜경궁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보고 약방제조 심환지에게 미리 원소에 가서 삼령차를 끓여 놓고 대기하라고 명령했다. 『정리의궤』 권1에 기록된 정조의 명령은 이렇다.“자궁의 건강이 밖에 나와 있는 동안 한결같이 강녕하여 경사와 행복이더할 데가 없었다. 조금 전 가마 앞에서 문후할 때 옥음玉音, 목소리이 균형을 잃었으니 자궁의 옥체가 손상되는 것을 어찌 우러러 보겠는가? 경은 먼저 원소로 가서 자궁에게 올릴 삼령차 1첩을 끓여 놓고 대기하도록 하라.”현륭원에 오른 혜경궁의 비통한 울음이 장막 밖으로 퍼졌고, 정조는 애를태우며 어쩔 줄을 몰랐다고 전한다. 현륭원 전배를 마친 정조는 돌아오는길에 서장대에 올라 군사조련을 관람한다. 서장대는 화성 성곽에서 가장높고 가파르며 사방을 훤히 조망할 수 있는 최적지인 팔봉산八逢山 정상에위치하고 있었다. 낮 훈련인 ‘주조’와 야간 훈련인 ‘야조’를 참관하는데 위도상은 야조의 한 장면이다. 오전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참배하고오후에 바로 이어진 군사훈련이라는 점에서 정조가 계획한 7박 8일은 굉장히 바쁜 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정조는 이날 오후부터 진행된 훈련을이튿날 새벽까지 참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화성부 군인들의 움직임을 칭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도상은 여타 3점의 병풍에 등장하는 도상과는 가장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구성으로 제작됐다. 서장대의 모양, 이를 에워싼 군병의 대열과 형태, 길고 좁아진 화성의 형태에서 이러한 차이가 두드러지는데, 나머지 폭들이동일한 모본을 추정케 했다면 위 작품은 몇몇 도안의 생략과 성벽과 같은세부표현이 다른 양상을 띠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곳인 서장대 아래로간소화된 화성행궁의 모습과 화면 편의상 둥근 타원형으로 성곽을 묘사하던 화성의 모습을 실제의 윤곽에 가깝도록 그린 것은 오히려 『화성성역의궤』의 <화성전도〉와 상통하는 부분이 많다고 볼 수 있다.참고도판각 소장본의 <서장대야조도> 부분봉수당진찬도윤2월 13일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하여 봉수당에서 베푼 연회봉수당에서 혜경궁을 주인공으로 한 진찬은 화성에서의 일정 가운데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정조는 건물 이름을 ‘봉수당奉壽堂’으로 정하고 현판의글씨를 직접 썼는데 여기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가 있었다. 행사절차는 숙종과 영조대의 『진찬의궤』를 참고해 진행됐으며, 작품에는 주렴이 드리워져 실내가 표현되어있진 않지만 혜경궁의 좌석은 내전의 북벽에 남향으로, 정조의 좌석은 혜경궁 좌석의 동쪽으로 배치했다고 전한다.또한 당시 혜경궁의 복식은 예의禮衣, 정조와 신하들은 융복, 유생은 청금복靑衿服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상단부터 구성을 이르자면 정조의 시연위, 배위를 가장 윗부분에 두고 장생도 병풍을 두른 것이 확인된다. 이는 『정리의궤』에 따르면 혜경궁의 자리와 정조의 시연위에 십장생병풍을 썼고 진채병 2좌를 더 사용했다는 부분과 일치한다. 중단에는 보계위의 선유락과 악공, 척신 시연위가 존재하는데 여타 능행도병에 비해 여령들의 복색과 착의 상태가 잘 드러나도록그려진 것이 특징이다. 다른 소장본들은 이와 복식이 동일하나 복색이 다르거나 착의 상태가 불분명하게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하단으로는 중앙문바깥으로 배종백관이 두 줄로 자리한 모습으로 마무리 되었다.전반적으로 평면적인 묘사지만 세부 기물표현에서는 뚜렷한 원근 의식을갖추고 있으며 정조의 찬안을 올린 상이 흑색인 점, 그림 속 병풍이 십장생도로 보이는 점, 화촉대와 여령의 묘사 등 의궤의 기록에 매우 충실한측면이 드러나는 폭이라고 할 수 있다.참고도판각 소장본의 <봉수당진찬도> 배위 부분참고도판각 소장본의 <봉수당진찬도> 선유락 부분낙남헌양로연도윤2월 14일정조가 낙남헌에서 노인들을 위해 베푼 연회 모습양로연은 노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낙남헌에서 베푼 연회로, 혜경궁에게올린 진찬례의 취지와 연계된 행사였다.

봉수당진찬이 거행된 이튿날 진시辰時, 오전7:30-8:30에 백성들에게 쌀을 나눠준 직후 시작됐으며 정조가 친히 배석해 베풀어졌다. 팔순의 영의정 홍낙성洪樂性, 1718-1798 등 수가노인隨駕老人 15인과 화성에 거주하는 노인 384인이 참석했는데 이날 정조와 관리들은 융복, 서민들은 평상복을 입은 것으로 그려져 있다.상단의 낙남헌 실내 중앙 정조의 자리는 어탑과 교의로 꾸며져 있고 그앞에는 정조가 마실 술항아리와 잔대 및 술잔이 놓인 수주정壽酒이 그려져 있다. 주변에는 거문고, 생황 등을 다루는 악공과 가자歌者가 북향을 한채 서 있으며 뒤로는 뜰 위에 열 지어 서인 노인들이 북향해 앉아있다. 이부분은 본래 『정리의궤』에 따르면 동서로 나누어 서로 마주보고 앉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여타 능행도병 또한 이러한 구도를 갖춘 것으로 보아태초 모본의 구성이 이렇게 단순화 되었던 것으로 봐야하겠다. 낙남헌 주변은 호위군관들에 의해 삼면이 둘러싸여 있는데 이는 외부인의 출입을단속하라는 전교에 의한 것이었다. 환위작문의 대열로 정조가 머문 곳을숙위하는 모습이었겠으나 해당 폭은 좌우가 일부 잘려 확인하기 어렵고‘화성성묘전배도’나 ‘환어행렬도’ 등 다른 폭에서는 찾아 볼 수 있다. 작문밖으로 먼 지방에서부터 왕을 보러 온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하는데 그러한 관광민인들의 모습이 상당히 생동감있게 묘사되어 현장감을 전달하고 있다. 어린이, 부녀자 등 남녀노소 다양한 행태를 풍속적으로 그린 것은 이전의 궁중행사도에서 보기 어려웠던 부분으로, 잔칫날의 고조된 분위기 속 다투고 말리는 군중들의 소란스러운 모습이 여과 없이 그려진 점이 흥미롭다. 이는 경사스러운 행사를 맞아 백성들의 운집을비중있게 다뤄 태평한 시대의 성덕을 드러내려한 것으로 추정된다.행사 중 재배할 때 노인들의 나이를 고려해 첫 번째 절 이후 두 번째는 그대로 앉아 절하도록 배려했으며, 노인들이 절을 할 때는 정조는 자리에서일어나는 것으로 예를 표했다. 또한 영의정, 우의정 등 관리들이 정조에게술잔을 올릴 때 정조 또한 노인들에게 술잔을 돌렸고, 잔치가 끝나자 남은음식을 청색 보자기에 싸서 가지고 가도록 했다.

이후 화성에 거주하는 양로연 참가자는 한 자급을 올려주는 특혜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참고도판각 소장본의 <낙남헌양로연도> 부분득중정어사도윤2월 14일정조가 득중정에서 활쏘기와 불꽃놀이를 즐기는 모습정조는 14일에 양로연을 끝내고 신시申時, 오후3:30-4:30에 어사대가 있는 득중정에 나아가 활쏘기와 불꽃놀이를 즐겼는데, 이 장면에서도 오전에 행사를 거행한 낙남헌의 정조 어좌와 가교 안의 혜경궁 자리 뒤에 십장생도병이 설치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우측의 건물이 상대적으로 적게 표현됐는데 이는 좌우 부분이 일부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화면 중앙의 화살받이와 매화포가 터지는 불꽃부분의 간격이 넓게 펼쳐져 있으며 진을 친군병대열과 관광민인의 배치가 하단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매화포의 굉음과 함께 떨어지는 불꽃의 화려함에 놀라고 신기해하는 많은 구경꾼들의 모습은 흥분과 소란스러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으며 이는여타 폭들과 대비해서 병사들과 백성들의 경계가 많이 허물어져 있는 부분으로도 확인된다.이날 정조의 활쏘기 성적은 유엽전柳葉箭 6순巡, 30발에 24시矢, 소포小布 5순에 24시, 장혁掌革 1순에 3발을 맞췄다고 전한다. 해가 저문 후에도 정조는 계속해서 활쏘기를 했는데 이때는 소적小的을 설치하고 좌우에 두 개의 횃불을 두었으며, 2순에 5시를 맞추었다고 『정리의궤』 권1에 기록되어있다.참고도판각 소장본의 <득중정어사도> 부분환어행렬도윤2월 15일정조 일행이 화성능행을 마치고창덕궁으로 돌아오는 행렬윤2월 15일, 화성에서 4일간의 제반행사를 모두 마친 정조 일행은 화성행궁을 출발해 사근평행궁에서 점심을 먹고 행궁의 관리들을 불러 고을의문제점과 백성들의 어려움을 물은 후 한양에 도달하기 전 하루 묵을 시흥행궁으로 향했다. 작품은 시흥행궁으로 가는 도중에 행렬을 잠시 멈추고혜경궁에게 미반을 올리고 있는 모습으로, 화면 위쪽에 정조의 어마와 흰색 휘장이 둘러진 혜경궁의 가교가 보이고 하단 왼편에 시흥행궁이 보인다.본 환어행렬도는 여타 소장본들에 비해 화면의 좌측 부분이 일부 잘린 상태인데 오히려 윗부분은 그대로인 모습이다. 삼성미술관 소장의 낱폭 <환어행렬도〉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공해公廨와 행렬의 후미가 그려져 있기때문이다. 之자형으로 난 길로는 대단위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고 주변으로는 백성들의 군집이 완연하다. 고을 곳곳에 자리를 편 백성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간만의 구경거리에 신난 모습인데, 이중에는 갓 쓴 이들뿐 아니라 아녀자와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도 그려져 눈길을 끈다. 특히 나랏님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긴 행렬 구간 중 어마와 휘장이 둘러진가교 주변으로 군집이 유난스럽다. 전반적인 산수는 윤곽 위주로 표현했으며 엷게 칠한 녹색 위로 청색주름을 가해 굴곡을 나타냈다. 수직적인 구도의 능행도병 중 <한강주교환어도〉와 함께 가장 회화성과 밀도가 뛰어난폭으로 볼 수 있다.참고도판각 소장본의 <환어행렬도>, 공해와 후미참고도판각 소장본의 <환어행렬도>, 시흥행궁한강주교환어도윤2월 16일한강을 건너기 위해 배다리를 건너는 정조 일행윤2월 16일, 시흥행궁에서 하룻밤을 지낸 정조 일행은 중간에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 노량행궁 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궁궐로 향한다. 시흥행궁을 출발할 때 정조는 시흥의 백성들을 만나 어려움을 묻고는 요역과 호역을 견감하거나 폐지했다고 전해 민심을 읽으려했던 성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작품은 한양에 다다른 행렬이 노량진에 설치된 배다리로 한강을 건너 창덕궁으로 돌아가는 장면이다. 정조가 탄 어마와 혜경궁 가교는 화면 중단에서 한창 다리를 건너는 중으로 이제 막 남단의 홍살문을 통과하는 모습이다.

하단에는 가교를 잇다가 남은 배들이 일렬로 정렬했으며 역시나 행렬을 맞이하는 백성들의 인파가 보이는데 주교가 상대적으로 길게 구성되어 하단에 많은 인파를 표현하기엔 공간의 여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주교의 좌우로는 한강 물결을 가는 선으로 중첩해 표현하고 옅은 청색을가미해 생동감을 살렸다. <한강주교환어도〉는 여타 폭에 비해 상대적으로물결 여백부분의 상태가 좋지 않으나 앞서 언급한 <환어행렬도〉와 함께화성능행도 8폭 중 가장 높은 회화성을 자랑한다고 할 수 있다.기록에 따르면 이날 정조는 미륵현에 이르러 고개 위에 있는 대의 이름을‘지지대遲遲臺’라 명명했다고 한다. 그동안 부친의 묘소를 방문할 때마다 길을 떠나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자신의 모습을 형용한 이름이었다. 처음으로 혜경궁 홍씨와 함께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뵙고 돌아오는 정조의 마음에 일련의 다짐이 섰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대단위 행렬을 끝내고 창덕궁에 돌아온 후 한동안 마무리 작업이 이어졌다. 한 달 가까이 한강의 물길을 막으며 장관을 이루던 노량진의 배다리는 정조가 창덕궁으로 돌아온 다음 날인 17일에 해체되었고, 행차를 수행한 군병들을 위한위로행사가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의궤 간행절차가 있었다.

정조는 1795년의 행차에 대한 책을 만들어 후세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했다. 행차의 모든 절차가 담긴 그림을 그리도록 시켰으며 활자로 찍어낸 의궤를 만들도록지시했다. 이는 곧 정조라는 성군이 남긴 역사의 산물인 『정리의궤』와 이번에 소개하는 화성능행도병 탄생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