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09 17:02:16
맑은 유색의 조선청자로, 유약 아래 잡티 없이 정제된 태토가 투영돼 보일 만큼 잘 만들어진 편병이다.
청자이면서도 강한 푸른빛보다는 옅은 담채가 감도는데 이러한 빛깔은 고려의 것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이 작품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어가는 변화의 시기, 도자의 흐름 역시 청자에서 백자로 바뀌던 과도기적 양상을 내포하고 있다. 즉 조선시대 제작된 청자인 셈이다.조선청자는 전기에 한시적으로 제작되었다 전하며 『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에서 그 기록을 찾을 수 있다. ‘白磁 御膳用白磁器, 東宮用靑器, 禮賓用彩文器’, 왕은 백자기를 사용하고동궁세자은 청기를 사용하게 했다는 구절에서 실제 위계 별로 자기 사용에 구분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전기에 나오는 ‘청자靑磁’에 관한 기록은 태종太宗대에 1번, 세종世宗대에 4번, 문종文宗대에 1번, 성종成宗대에 4번이 있다.편병은 통일신라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다양한 재질로 만들어졌다. 제작방법은 동체를 성형한 후 굽과 구연을 따로 부착하는 방법과, 물레를 이용해 굽부터 구연까지 한 번에 성형하는 두 가지 방식이었다. 이 작품은 후자의 경우로. 병 안쪽에 물레흔이 남아 있으며 이는 분청사기 편병의 주 제작과정과도 유사하다. 다만 정면과 측면이 맞닿는 모서리의 각을 살린 분청자들에 비해 출품작은 굴곡을 완만히 조성해 둥그스름하고 부드러운 인상의 동체를 형성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옆면에서 바라봤을 때 하부를 더크게 제작해 조형적 안정감을 주었으며, 짧게 직립한 구연부와 두툼하게 외반한 입술 역시흐트러짐 없이 잘 성형했다. 굽 안쪽 면에는 소성 과정 중 터져 메운 흔적만 남아 있을 뿐그 형태가 온전하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이 전면에 시유된 청자유는 투명하고 맑으며, 유층에 균열이 없고 은은한 광택이 돈다.출품작은 과도기에 일시적으로 만들어진 만큼 희소성 높은 조선청자 한 점으로, 백자와분청자로 대표되는 조선 도자의 시작점에 고려 청자라는 자양분이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즉 청자가 쇠락하고 백자의 싹이 움트던 시기, 고려와 조선의 기술과 미감이 만나 조화를이룬 색다른 맛의 작품인 셈이다.조선청자는 아주 조금 만들어졌으며,종류는 素文・象嵌・陰刻文 등이 제조되었고,고려 말의 청자보다는 실질적인 면으로 안정・발전시켜양질의 청자가 15세기 후반까지는 번조된 것 같다.
.— 정양모, 『韓國의 陶磁器』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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