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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한국 고미술

구윤명 초상 具允明 肖像-ink and color on silk - 58.0☓86.5cm - 1785

by 주해 2022. 11. 19.

2019-06-25 04:26:18

 

 

 

구윤명은 영조의 총애를 받았던 능성綾城 구씨 집안의 인물로, 아버지 구택규와 함께 완성한 증수무원록增修無寃錄 뿐 아니라 전율통보典律通補, 영종어제속편英宗御製續編 등 많은 저서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 18세기 법체계와 규율에 있어 큰 족적을 남겼으며 이조를 제외한 육조의 판서를 두루역임하며 영·정조시기 당대 정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현재 그의 초상화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초본과 조중구가 구장했던 초상이 전하고 있는데 화원이 그린 정복초상은 이번에처음으로 소개된다. 초상화의 우측 상단에는 구윤명 스스로 화제를 남겼는데 75세 나이에 자신의초상화를 바라보는 감격과 소회에 대해 서술해 놓았다.

그 입이 바르니 세상일에 함부로 말하지 않은 자인가?

그 눈이 차분하니, 이해득실에 마음이 따라가지 않은 자인가?

나이가 기로사耆老社 들 때와 부합하니, 감히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라 말하겠구나. 팔곡八谷 구사맹具思孟, 1531-1604 선조께서 경자년에 기로사에 들어갔으니 이렇게 말한다. 반열이 부끄럽게도 보국輔國, 정1품 보국숭록대부이 됐으니, 정말 무슨 재능이 있고 무슨 덕이 있어서란 말인가. 사람들은 당대의 완전한 사람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옹은 스스로 성스러운 시대의 행운아라 말하고 싶구나. 이 그림을 보는 이들이, 혹시 참모습의 일단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을사년1785 가을 75세 옹 쓰다.

가부좌를 틀고 손은 모은 채 백발노인이 정면을 응시하는 좌상으로 쌍학흉배의 청색포 단령에 관모를 갖춘 화원 솜씨의 초상화이다. 18세기 초상화의 전형적인 형태를 갖췄으며 바닥에는 별도의 돗자리나 바닥 없이 전신을 인물만 채워놓은 구성이다. 당시 초상화를 그리던 화원으로는 화산관 이명기를 비롯해 단원 김홍도와 같은 조선 최고로 손꼽히는인물들이 즐비했으니 작품을 누가 그렸는지 확인하기 어렵지만 초상화의 품격이 빼어난 것은 필연적인 결과로 볼 수 있겠다. 조선역사에서 능성 구씨 집안은 많은 벼슬을 차지한 가문이었다. 특히 무관의 배출이 많았는데 꼭 다문 입술과 곧은 콧대,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와 서슬 어린 눈동자는 집안의 우직한 품성을 풍기는데 부족함이 없다. 나이를 먹은 탓에 백발과 주름이 성성해진 것은 어쩔 수 없지만 하늘로 뻗은 눈썹과 골 패인 볼, 길게 찢어진 봉황눈매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젊을 적 초상과 변함없는 모습이다. 작품에 스스로를 75세 옹이라 전할 뿐, 이름을 적지 않아 타국에서 이 작품이 처음 발견되었을 당시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웠으나 본인의 선조로 구사맹을 언급한 점과 보국輔國이라는 관직, 을사년이라는 단서 등을 추적한 결과 구윤명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초상화로 인물을 명료하게 단정지을 수 있었던 것은 특히 다행스러운 부분이었다.화제의 일부에서 간취되듯 구윤명은 스스로에게 엄격했던 인물로 보인다. 그의 저서대부분이 법전과 법의학과 관련되어있고 왕의 곁에서 어제를 정리해 편찬했었던 만큼 성향은 이에 기반한 것이 아닐까 싶다. 화제의 다른 부분에선 자신의 선조 구사맹을 언급하며 집안의 뼈대를 밝히고 있다. 구윤명의 조상인 구사맹은 인헌왕후의 아버지이자 임진왜란 때 선조를 수행한 인물로 지조와 청렴결백으로 유명해 능성 구씨집안의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200년이 지나 본인 또한 관직에 올라 평생을 나라에 바치다 같은 나이에 기로소耆老所 나이가 많은 임금이나 실직實職에 있는 70세가 넘은 정2품 이상의 문관들이 모이는 곳에 들어가게 되고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가 되니 그 감격적인 마음에 선조를 회자한 것으로 보인다.구윤명이 남긴 대표적인 저서로는 후대 군왕들을 위해 영조가 내린교훈을 받아 적어 정리한 ‘어제고금귀감御製古今年代龜鑑’과 역시 영조의 지시 하에 아버지 구택규와 함께 정조대에 완성한 법전‘전율통보典律通補’가 있다. 이외에도 ‘누구든지 억울한 죽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철저히 죽음의 원인을 밝히라’는정조의 지침을 수행한 현대 법의학서의 시초 ‘증수무원록增修無寃錄’에 이르기까지, 구윤명은 18세기 영·정조대왕이 추구했던 조선의 체계 구축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 작품은 미국 시카고에 머물다가 출품되었다.

참고도판〈구윤명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구윤명〉, 조중구 구장